이곳을 찾으시는 님들 ~ 날마다 좋은 날 되소서 -동대산-
<사진 / 상옥마을 손티계곡>
화냥년은 욕이 아니었답니다.
병자 호란은 1637년 1월 30일 조선의 왕이 청나라 태종 앞에서
무릎을 꿇고 항복함으로써 끝났다.
그러나 더욱 치욕스런 일이 그 다음에 일어났다.
청나라 군사가 철수 하면서 50여만명의 조선 여자를 포로로 끌고 간 것이다.
청나라는 이들 여성 포로들을 나이와 신분에 따라 값을
매겨 이를 갚으면 돌려 보내 주었다.
돈이 없어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거니와 값을 턱없이
높게 불러 생기는 비극도 있었다. 청나라 심양을 다녀온 좌의정
최명길의 말을 들어 보자.
제가 심양의 관사에 있을 때, 한 처녀를 값을 정하고 되찾으려고 했는데,
청나라 사람이 뒤에 약속을 깨고 값을 더 요구했습니다.
그러자 그 처녀가 돌아갈 수 없음을 알고 칼로 자신의
목을 찔러 죽고 말았습니다.
이에 끝내는 그녀의 시체를 사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값을 치르고 돌아오는 것을 속환이라 했고
속환되어 돌아온 여자를 환향녀라 불렀는데 환향녀의 비극이
속편처럼 잇따랐다. 예조에서는 왕에게 이 문제에 대한 방침을 요청했다.
곧 "사로잡혀 갔다가 돌아온 양반의 부녀자가 한둘이 아니니
조정에서 반드시 충분히 참작해 명백하게 결정해야 피차
난처한 걱정이 없을 것" 이라며 두 가지 예를 들었다.
인조 16년(1639) 3월 11일의 「인조 실록」을 보자.
신풍 부원군 장유가 예조에 쪽지를 올리기를
"외아들 장선징이 있는데 강도에 그의 아내가 잡혀 갔다가 속환되어
와 지금은 친정 부모집에 가 있다.
그대로 배필로 삼아 조상의 제사를 함께 받들 수 없으니,
이혼하고 새로 장가 들도록 허락해 달라"고 했다.
전에 승지였던 한이겸은, 자기 딸이 사로 잡혀 갔다가 속환되었는데
사위가 다시 장가를 들려고 한다는 이유로 그의 노복으로
하여금 꽹과리를 쳐서 임금에게 원통함을 호소하게 했다.
인조가 환향의 문제에 대한 의견을 구하자 좌의정 최명길이 나섰다.
제가 전에 심양에 갔을 때 양반 출신으로서 속환하기 위해 따라간 사람들이
아주 많았는데, 남편과 아내가 서로 만나자 부둥켜안고 통곡하기를 마치
저승에 있는 사람을 만난 듯이해, 길가다 보는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부모나 남편으로 돈이 부족해 속환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앞으로 차례로 가서 속환할 것입니다. 만약 이혼해도 된다는 명이
있으면 반드시 속환을 원하는 사람이 없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수많은
부녀자들을 영원히 이역의 귀신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은 소원을 이루고 백 집에서 원망을 품는다면 어찌 화기를 상하게
하기에 충분치 않다 하겠습니까. 신이 반복해서 생각해 보고 세상 형편이나
인심을 참작해 보아도 끝내 이혼하는 것이 옳은 줄을 모르겠습니다.
최명길은 계속 말한다.
제가 심양으로 갈 때에 들은 이야기인데, 청나라 병사들이 돌아갈 때
자색이 퍽 아름다운 한 처녀가 있어 청나라 사람들이 온갖 방법으로 달래고
협박했지만 끝내 들어 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사하보에 이르러 굶어 죽었는데, 청나라 사람들도 감탄해 묻어
주고 떠났다고 했습니다.
이로써 미루어 본다면 전쟁의 급박한 상황에서 몸을 더럽혔다는 누명을
뒤집어쓰고도 밝히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사로잡혀 간 부녀들을 몸을 더럽혔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인조는 최명길의 의견을 받아들여 그대로 시행하라고 했다.
그러나 이 날의 일을 기록한 사관은 「인조 실록」에다 자신의 견해를
덧붙여 놓았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
이는 절개가 국가에 관계되고 우주의 동량이 되기 때문이다. 사로잡혀 갔던
부녀들은, 비록 그녀들의 본심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변을 만났어도 죽지
않았으니, 절의를 잃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절개를 잃었으면 남편의
집과는 이미 의리가 끊어진 것이니,
억지로 다시 합하게 해서 사대부의
기풍을 더럽힐 수는 절대로 없다. 예로부터 이르기를 "절의를 잃은 사람과
짝이 되면 이는 자신도 절의를 잃는 것이다"고 했다.
절의를 잃은 부인을 다시 취해 부모를 섬기고 종사를 받들며 자손을
낳고 가세를 잇는다면,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는가.
아, 백 년 동안 내려온 나라의 풍속을 무너뜨리고,
오랑캐로 만든 자는 최명길이다. 통분함을 금할 수 있겠는가.
때리는 시어미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했던가.
조선의 여성들을 더욱 괴롭힌 것은 오랑캐보다도 이 사관의 생각과 같은
유교 문화의 관념이 아니었을까. 아마도 최명길 같은 사람보다는
사관과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우세하게 많았던 모양이다.
왕의 명령과 지시가 내려졌는데도 이 뒤로 사대부집 자제는 거의 다시
장가를 들고 다시 합하는 자가 없었다고 「인조 실록」은 전한다.
환향녀라는 말은 세월을 거치면서 오늘날 화냥년이라는 말로 남았는데 국어
사전에는 화냥년을 일컬어 '남편 아닌 사내와 관계를 하는 계집'이라 쓰고 있다.
환향녀들이 억울한 삶을 마치고 죽은지 몇백 년이 지났으되, 이 여인들에
대한 비겁한 사대부들의 생각은 화냥년이라는 말 속에
오늘날까지 살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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